무더위 속에서 일주일이 가까운 서울 일정 동안 친구들 집을 전전할 생각을 하니 땀에 젖어버릴 옷가지가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이참에 서울에서 티셔츠라도 한 장 구입하자고 마음 먹은 것은 나로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옷이 모자라니 하나 사자고 아내가 말을 꺼낸 것이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만큼 옷을 산다는 것이 왠지 쉽지 않은 나였기에 이번 서울 일정은 옷 한벌 구입할 정말 좋은 기회였던 셈인데
마침 학회 참석차 서울에 온 형이 논현동에 계신 고모님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거기 합류하기로 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오랜만에 친정 조카 둘을 한꺼번에 맞이한 고모님은 아침밥이며 빨래를 바지런하게도 챙겨주셨고
땀에 젖은 옷 걱정이 없어진 나는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옷을 사겠다고...'라는 말만 되뇌이고 있다.
덕분에 마음 먹은 옷 구입은 또 해를 넘기게 되었지만, 오랜만에 형과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91년 그러니까 형이 충남대에 진학하면서 집을 떠난 후로 20년 흘렀다.
그후 형은 결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고, 나는 결혼과 함께 여기저기 떠돌다 제주도에 자리를 잡았다.
겨우 한 살 많은 형이지만 형은 나에게 참 특별한 사람이다.
마르고 재빠른 나와 넉넉한 살집에 느긋하기 그지없는 형은 형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통점이 잘 없다.
그렇게 다른 성격과 체질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배울 점도 참 많다.
무엇보다도 나의 형은 참 좋은 형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형과 달리 어릴 때부터 성격이 급하고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던 나는 유명한 '가시손'이었다.
아버지가 새로 사오신 장난감을 하루만에 고장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버지가 아끼는 물건을 잘못 손대서 못쓰게 만드는 일도 많아서
아버지의 호통과 고함을 독차지했다.
중학교 때인가 아버지가 아끼던 무언가를 또 손댔다가 떨어뜨려 깨뜨린 일이 있다.
그런 일로 혼나는 건 일상이 된 나였지만 그날은 좀 걱정이 많이 되서 안절부절이었는데 마침 상황을 알게된 형이 백기사를 자청했다.
결국 형이 실수로 깨뜨린 것으로 되면서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형은 또 내가 중요하나 결정을 할 때마다 가장 힘이 되는 답을 주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방송반 활동을 시작할 때, 그리고 다시 2학년 때는 방송반을 그만두고 학생회 일을 시작할 때
3학년 때 학생회장에 출마할 때에도, 취업준비를 그만두고 창업을 결심했을 때에도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고 그때마다 형의 의견을 물었다.
나의 생각을 한 동안 들은 형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지금까지 너는 항상 좋은 결정을 해왔고 그 결정을 책임져왔다.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나의 결정이 좋은 결정으로 남게 되도록 애썼고 그 결정을 책임지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덧붙여 다음에 또 어떤 일로 형과 상의할 일이 있을 때 같은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한다면 좀 과장이 될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프랑스에서 재기를 준비하시는 동안 나는 뒤늦게 군대에 가야했다.
주말에 과외라도 해서 용돈도 벌고 어머니 생활비라도 보태겠다는 욕심으로 카투사에 지원했는데 얄궂게도 외출이 불가능한 헌병대에 배치가 되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답이 보이지 않았던 그 무렵 마침 학교에서 조교 일을 하게된 형은 내가 군대에 있던 동안 매달 용돈을 보내주었다.
그 무렵에 형의 편지에 썼던 글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형과 동생이 아니라 남으로 만났더라도 네가 참 좋았을 것 같다.'는 형의 글이 그때는 내가 힘들어도 희망을 가져야할 이유였다.
형이 결혼과 함께 일본에 유학을 떠나고 갑자기 아이까지 생겼던 10년 전 쯤은 우리집이 가장 힘들 때였다.
환율은 어이없이 떨어지고 부모님이 약속한 학비를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형수는 공부를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며 민박집을 시작했다.
다행히 친구들, 선배들과 시작한 회사가 자리를 잡아 월급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매달 조카가 쓸 일회용 기저귀와 라면, 과자 따위를 포장해서 일본에 보내야 했다.
구호물품이라도 기다리듯 한국에서 오는 소포를 기다릴 형과 형수를 생각하면 소포를 보낼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남들은 형에게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아내가 번 돈으로 공부하고, 지방대 나와서 동경대에서 박사를 하고, 산림자원학에서 시작해 산림욕이라는 유망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모교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고모님도 '고등학교때는 니가 훨씬 공부를 잘했는데 형은 교수가 되어서 배 아프지 않느냐'고 농담처럼 말을 하신다.
적어도 나는 형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이 자신의 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태도를 잘 알기 때문이다.
형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운을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니 적어도 서울대보다 동경대가 더 좋은 대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서울대는 박범진을 뽑을 수 없지만 동경대는 박범진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학기부터 형은 일본 치바대학교를 떠나 모교인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어차피 바다 건너지만 한참 가까와진 느낌이라 힘이 난다.
형의 인생에서 내가 어떤 힘이 되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에게 누군가 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는 신뢰가
그 어떤 세상의 평가보다도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같이 살아보고 그의 수많은 단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는 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또 참 고맙다.
그저 '우리 형이 충남대 교수가 되었다고',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데 또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어쨌든 기분이 참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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